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1

2022. 11. 18. 11:40기타/독서

삶의 태도, 철학, 사랑에 관련된 책들을 읽으면 대부분 심리적인 내용만 다룬다.

왜 그런 감정이 생기며 어떤 행동을 해서 나아질 수 있고 등등.

하지만 이 책은 상황을 분석하며 경제적 과잉, 기술 맹신 등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포함해서 현대인의 심리를 분석한 책이다.

 

삶을 사랑할 자유에 대한 에리히 프롬 철학의 정수가 담긴 수작.


차례

  •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 이기심과 자기애
  • 창의적인 삶
  • 죽음에 대한 태도
  • 무력감에 대하여
  • 기본 소득으로 자유를 얻으려면
  • 소비하는 인간의 공허함
  • 활동적인 삶

차례를 보자마자 이 책은 무조건 흥미로울 거라고 확신했다.  특히 죽음에 대한 태도가

제일 궁금했다. 평소에 관심이 많았고, 인간의 삶에서 죽음은 필연적이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발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우리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 행동을 통제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다

평생 한 번도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해방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이들은 행동의 결과에 확신이 없으면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다.

의심 탓에 항상 마음이 괴롭고 안간힘을 써 확신을 찾으며

확신을 찾지 못하면 더 심한 의심에 사로잡혀 괴로워한다.

 

나는 의심이 많은 편이다. Yes or No 가 있으면 그에 맞는 명확한 이유를 갈망한다.

좋게 말하면 계획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걱정이 너무 많다.

습관적으로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한다. 마치 내가 그 모든 순간들을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듯이.

 

소프트웨어 개발을 공부하면서 그 습관에 더더욱 박차를 가하는 것 같다.

원인을 도출하기 위해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즐겁기도 하고 결론에 도달했을 때의 뿌듯함이 좋다.

 

일상생활에서도 걱정을 꽤 하는 편이다. 버스가 언제 오는지

버스 도착 시간을 몇 초마다 확인하고

그 버스를 타면 몇 분 걸려서 여기 내리고, 환승하고 걷고

생각이 시작되면 멈추지 않고 뻗어나간다.

 

지하철을 기다릴때면 어제 해결하지 못한 오류들, 오늘의 목표들이 떠오른다.

생각하려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나를 의식하면 나는 이미 생각 중이다.

 

내가 내 삶을 통제하고 습관을 들이려는 자세가 늘 정답은 아닌 것 같다.

가끔씩은 삶을 여유롭게, 나의 24시간을 관찰자의 시점에서 바라봐도 좋을 것 같다.


삶을 사랑하기가 그토록 힘든 이유 중 또 하나는

날로 커지며 절대 채워지지 않을 사물에 대한 우리의 욕심 때문이다.

 

물론 분명 사물은 인간에게 기여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하지만 사물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 자체를 추구할 경우

사물은 삶에 대한 인간의 관심과 사랑을 부수고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 즉 사물로 만들려는 경향을 띤다.

 

( 내 경험상 ) 나는 상대적으로 물욕이 없어서 공감은 되지 않지만,

불분명한 목적을 지닌 소비, 보여주기 식 소비를 자주 봐서 이해는 된다.

본인의 스트레스를 물질적인 보상으로 해소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아끼면 똥 된다. 돈은 쓸 때 행복하다. 공감하는 말이긴 하지만

돈을 쓸 때 행복하다는 말을 듣고 소비하는 경우와

이 소비가 나에게 주는 가치를 알고 소비하는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까, 이유 없이 발생하는 수동적 소비는 나와 맞지 않는다.


삶을 사랑하기 힘든 또 다른 이유는 행동의 관료화가 심해지기 때문이다.

'팀워크'니 '집단정신'이니 하는 듣기 좋은 명칭을 아무리 가져다 붙여도

최대의 경제성을 목표로 개인을 재단해

적절한 집단 구성원 형식에 맞추려 한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러면 개인은 능력 있고 규율을 잘 지키지만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며

온전히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하기에 삶을 사랑하는 그의 능력은 마비되고 만다.

 

나는 교수님께서 운영하시는 연구팀에 속해있다. IoT 분야에서 업계 최고가 목표이자 방향성이다.

'팀워크' '전문가' 등의 키워드가 매우 익숙해서 이 문구를 보자마자 내 집단이 떠올랐다.

'개인을 재단해 적절한 집단 구성원 형식에 맞추려 한다는 사실'

내 집단과 비교해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교수님께서는 전문가 조직을 추구하시기에 꽤 높은 자율성을 부여하신다.

책에서 말한 '재단'을 찾아보자면 9시~6시 업무가 교수님께서 정하신

최소한의, 그리고 유일한 재단이라고 생각한다.

 

업무라 하면 수동적인 서류 작업이 아니라 현재 내 프로젝트의 오류를 찾고 수정하고 결과를 내는 작업이다.

매우 능동적이다. 물론 교수님께서 어느 정도의 업무지시를 하신다. 나머지는 개인의 몫이다.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닌, 본인의 선택으로 집단에 들어와서 흘러가는 과정들이 좋다.

몰입해서 나를 가꾸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내 삶을 내가 채워나간다는 기분이 너무 좋다.

 

책의 내용과 다르게 자율성을 존중받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삶을 사랑하게 되며,

자연스럽게 능률이 오르면서 프로젝트도 원활하게 진행되는 것 같다.


2.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

인간은 자연의 변덕이다. 유일하게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생명체다.

인간은 자연에서 사는 동시에 자연을 초월하는 유일한 존재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과거, 미래를 자각한다.

인간은 동물처럼 본능적으로만 살지 않는다.

자연에서 거의 뿌리 뽑힌 존재이며,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이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는 과제를 떠안는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생각하다 보면 물음표가 끊임없이 따라다녀

근본적인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는 느낌이다.

 

'인간'은 본인도 모르게 세상을 본인 중심으로 생각하며

개인, 집단뿐만 아니라 자연, 우주조차 법칙을 가정하며 모든 걸 통제하려 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고 그렇게 생각하도록 되어있으니까.

 

어느 날 '인간은 호르몬의 노예'라는 말을 들었다. 아주 흥미로웠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질을, 누군가 합리적인 기준을 세웠다는

그런 통쾌함이 느껴져서 일까.

 

나를 '무수히 많은 인간 경우의 수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흥미롭다.

물론 나를 깎아내리는 말이 아니라, 나를 그저 '객관적'이라는 인간 용어로 바라본 것이다.

'나'라는 존재 자체도 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일 뿐인데

그 존재가 겪는 고난들은 얼마나 더 낮은 확률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순간들인가.


결국 목적이 되어버린 수단, 사물의 생산만이 중요한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물로 바꾼다. 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제작하고,

점점 더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생산한다.

 

19세기에는 노예가 될지 모를 위험이 있었다면

20세기에는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될 위험이 있다.

 

소프트웨어를 공부하다 보면 인공지능에 관련된 내용을 자주 접한다. 아직 인공지능

모델을 만들어보지는 못했지만, 오픈소스 인공지능을 사용하다 보면 정말로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려 한다'는 말이 허언은 아닌 듯하다.

 

인간 수준을 넘어선 자동화, 학습능력, 판단력 의 성장 속도가 엄청나다.

머지않은 미래에 인간이 단순노동을 위한 부속품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현대의 과제는 무엇일까? 19세기 이후 심화되어온 우리의 자세를 깨닫고 극복하는 것.

그 자세란 인간을 지성과 감성으로 가르는 것, 즉 사고와 감정의 분리다.

...

스피노자는 이런 이분법을 벗어난 예외 인물이었다.

그는 두 가지 감정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수동적/능동적 감정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수동적 감정은 대체로 지금 우리가 비합리적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

질투와 증오 같은 감정과 일치한다. 수동적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노예다.

 

하지만 수동적 감정의 반대편에는 우리의 활동 능력을 키워주는 능동적 감정이 있다.

이 능동적 감정을 통해 우리는 주인이 된다. 그것이 인간 본성의 모델과 일치하며,

성장하는 활력의 진전과 동행하고 기쁨을 경험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정신력, 굳건한 의지, 관용이 그것이다.

 

스피노자는 평소에 내가 관심이 있었던 철학자다. 명언을 좋아하다 보니 좋아하게 되었다.

스피노자가 주장하는 수동적/능동적 감정. 수동적 감정을 느낄 때 노예가 된다는 말이 좋다.

그런 감정이 들면, 그 감정에 휩쓸려가는 기분이다.

 

하지만 능동적 감정은 나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준다. 명칭은 '능동적'이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은 다르다. 능동적 감정은 자연스레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동적 감정이

자연스레 발생하는 듯하다. 침울한 본인보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볼 때 질투를 느낀 사람은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수동적 감정이 발생한다.

 

오히려 능동적 감정들이, 목표를 갖고 몸소 행동할 때 아주 수동적으로 발생하는 것 같다.

언젠가 정신력이 자리 잡겠지, 목표의식이 생기겠지 하고 다짐했던 적이 있는데

그저 허상일 뿐 능동적 감정이 발생하진 않았다. 

 

나는 수동적/능동적 보다는 선천적/후천적 감정으로 지칭하고 싶다.


현대의 윤리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떠안아야 할 두 번째 과제는

창조적 인간이 되어 소비와 수용의 태도를 극복하는 것이다.

하나의 태도, 하나의 성격, 인간과 세계를 대하는 하나의 자세로서 창조성이다.

 

책을 읽고서도 내가  똑같은 사람이라면

그 책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거나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그 책을 그저 소비한 것이다.

 

삶을 대하는 태도, 성격, 사회의 여러 가지 측면을 바라볼 때 창조성을 갖고

넓은 시야로 바라보라는 의미 같다. 같은 책을 읽더라도 누가 읽느냐에 따라

흡수하는 정도가 다른 것 같다. 각자의 상황과 편견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모두는 그저 책을 소비한 것이다. 소비의 형태는 같지만 그 깊이는 천차만별이다.

가벼운 책을 읽더라도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성장하고 싶다.


결정적인 지점을 조금 더 설명하면, 창조성은 세계를 인식하고

그 세계에 대답하는 자세다. 평생 사물을 의식적으로 경험했고 

그 사물에 대답하며 살았다는 항변은 통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는 사물을 인식하지 않거나 아주 제한적으로만 인식한다.

 

나는 장미를 보며 "이것은 장미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대상을 보고 그 대상을 장미로 분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장미'의 범주에 포함되므로 이름이 '장미'이고,

따라서 나는 내가 장미를 본다고 말한다.

 

현대 물리학에서 자주 거론되는 내용이다. '존재'에 대한 불확정성.

어디까지나 '존재'는 관찰자의 기준이기에, 관찰자가 없는 순간의 존재는

존재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행위는 하나의 대상을 보고

우리의 뇌가 처리 동작을 거치는 전체적인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보고 봤다고 하는 걸까.

그것이 '장미'라는 이름을 가졌다 해서 그것의 본질은 '장미' 인가?


산을 볼 때 가장 먼저 산 이름은 무엇인지, 얼마나 높은지 의문을 갖는다.

그러면 나는 곧 그 산을 잊어버린다. 산 이름과 높이를 안다는 사실이

내가 산을 본다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에도 

산 이름과 높이를 알면 나는 그 산을 잊을 수 있다. 어쩌면 산 사진을 한 장 찍을 수도 있다.

집에 돌아와 아이들에게 사진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나는 실제로 그 산을 보지 않았다.

 

대부분 우리는 산을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난다.

사람들을 지성적이고 추상적으로 분류하지만 실제로 그들을 보지 않는다.

 

남편이나 아내, 자식이나 친구처럼 정말로 잘 아는 사람을

난생처음 보는 사람인 양 바라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예전보다 더 실제인 듯 보이고, 갑자기 베일이 걷혀서

이제야 그를 '실제로' 보는 것 같은 경험 말이다.

 

대상, 자연,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면 우리는 그들을 보고 듣는다고 착각하지만

그 관계는 애당초 추상적이고 지성적인 분류의 방식이다.

 

인간은 애당초 평생 착각 속에 사는 생명체일까.

나도 무언가를 보고 듣고 생각하지만 내가 그것을 실제로 보고 들었다기보다는

내 뇌의 연산 결과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거니까.

 

자주 만나는 사람을 가끔 보다 보면,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이제야 그/그녀를 실제로 보는 것 같은 경험을 한다.

사소한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생각하며 그/그녀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행위가

마치 그/그녀의 우주를 보는 듯하다.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사과가 시간이 지나서 색이 변한 게 아니다.

시간이라는 착각 속에 그저 불가피한 변색이 발생한 걸까?

보이는 것을 연산과정 없이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이 올까.

언젠가 그 순간이 오더라도, 그 본질조차 인간의 기준이라면?

 


자신을, 자신의 호불호를 타인에게 투영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훈련과 감수성, 매우 높은 객관성이 필요하다.

그에 더해 높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에겐 바로 그 집중력이 부족하다.

 

바쁘기 때문에, 동시에 모든 것을 하려고 들기 때문에

우리는 지구 역사상 가장 집중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나의 호불호를 타인에게 투영하곤 했었다.

그래야 내가 편하니까. 그저 그게 전부였던 것 같다.

나에게 있어 '불호'의 형태를 띠는 사람들에겐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들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결핍이었다.

그 행위의 끝은 어디인가. 만약 남이 날 위해 맞춰 행동하더라도

그 연장선의 끝은 보지 않아도 알 듯하다.

 

집중력. 공부를 떠나서 삶에 대한 집중력을 말하는 듯하다.

호모 컨슈머리쿠스. 포노 사피엔스. 현대인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삶에 집중하지 못하고 물질적인 욕구만 중요시하곤 한다.

휴대폰 없이는 '내'가 '내'가 될 수 없다.

책을 읽을수록 '호모' 와의 거리감이 유독 느껴진다.


3."이기심과 자기애 "

인간을 근본적으로 사악하고 무력한 존재로 보는 게 칼뱅 신학이다.

칼뱅 신학에서 인간은 자기 힘과 노력으로는 결코 선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라고 칼뱅은 말한다.

 

개인이 궁핍하고 하찮다고 이렇듯 확실히 못 박는 것은

인간에게는 사랑하고 존중할 만한 것이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이런 이론의 뿌리는 자기 멸시와 자기 증오다.

칼뱅은 자기애를 '역병'이라 부름으로써 매우 확실하게 그 사실을 밝힌다.

 

각 시대의 철학가들의 생각을 처음 알게 될 때의 그 오묘한 기분이 있다.

칼뱅의 신학도 공감되는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기에 흥미롭다.

인간 존재를 하찮게 여기면서도 그 행위가 개인적인 의견이 아닌,

저항할 수 없는( 신의 뜻 ) 상황임을 받아들이자는 겸허한 태도가 좋다.

 

영화 어벤저스:엔드게임에서 타노스를 물리치기 위해

본인의 존재를 희생한 아이언맨이 생각난다.

'자기애'가 높은 아이언맨이 자신이 본인 삶의 주인인 양 행동했다면

그 영화의 결말은 달라졌을 것이다.


칼뱅의 신학과 칸트의 철학은 큰 차이가 있지만

자기애 문제를 대하는 기본자세는 동일하다.

 

칸트에겐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 덕목이다.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것은 윤리적 입장에서 볼 때 중요하지 않다.

인간은 본성상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성에 따른 행복 추구는 긍정적인 윤리적 가치를 지닐 수 없다.

물론 칸트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굳이 그만둘 필요는 없다고 본다.

 

칼뱅의 신학과 상충하는 칸트의 철학이지만 '자기애' 만큼은 비슷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에,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칸트의 철학이다.

 

하지만 그 본능에 따른 행복 추구는 긍정적인 가치를 지니지는 않는다.

개인 모두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에

서로 맞지 않는 삶이 충돌하는 순간 좋지 않은 결말을 야기한다.

 

행복 추구를 그만둘 필요는 없다고 말하지만,

인간의 본능이기에 그만둘 수 없다는 걸 알았던 건 아닐까.


칸트는 이기심을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호감을 품는 자기애 "의 행복과

"자신에 대한 만족"의 행복으로 구분한다.

전자는 무엇보다 자기 사랑을 뜻하며, 후자는 자만을 뜻한다.

그러나 '합리적 자기애' 마저 도덕법의 제재를 받아야 하며,

자신을 향한 호감은 근절되어야 한다.

 

칸트는 칼뱅이나 루터보다 개인의 고결함을 훨씬 더 존중했지만

최악의 독재에도 개인에게 저항할 권리를 주지는 않았다.

인간이 야수가 되지 않고 인간 사회가 무정부주의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 악을 억눌러야 한다.

그 방법은 도덕법, 즉 정언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철학을 복수전공 한 사람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했던가.

읽을수록 어렵고 머리가 아프다. 철학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면 여기서 진작 책을 덮었을 것이다.

 

칼뱅과 칸트 둘 다 인간의 하찮음을 강조하지만,

개인의 자율성과 존엄성도 강조한다.

모순 덩어리다. 인간의 본성을 깨달았기에 그 하찮음을 견딜 수 없어

최소한의 배려로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한 것일까.

 

철학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깊은 생각을 직접 경험해 보고 싶다.

그들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밤새 떠들 수 있을 것 같다.

머리가 둘로 나뉠 것 같은 고통과 함께.


현대 철학의 막스 슈티르너와 니체 역시 이기심을 평가할 때는

칸트가 칼뱅과 대립하지만 이웃 사랑과 자기애를 양자택일해야 할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그들과 생각이 같다.

또 한편으로 그들은 이웃 사랑을 나약함과 자기 포기의 표현으로 보며

이기주의, 이기심, 자기애를 덕목이라 선언한다.

 

슈티르너는 말한다. "사랑은 제물만 알고 희생을 요구한다 "

슈티르너가 말한 사랑은 자기 자아 바깥에 있는 특정한 것을

어떤 사람 혹은 어떤 것으로부터 얻어내기 위해 

개인이 스스로를 수단으로 삼는 마조히즘적 예속이다.

 

이웃 사랑과 자기애는 대립구도가 맞다고 생각한다.

내 주변에 자존감, 자기애를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남에게는 매우 친절하다. 하지만 나는 그 친절함에서 모순을 발견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의지가 없기에,

남에게 칭찬받을 수 있는 행위인 '이웃 사랑'을 끌려다니듯 실천한다.

본인의 문제 상황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본인을 수단으로 삼아

그 과정이 자기혐오의 연장선일지라도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나의 이타심이 언제 한 번 얘기를 나눠보라 하지만

나의 이기심이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지 말라고 나를 떠민다.

그 이타심조차 나도 모르게 그 존재를 하찮게 여긴 이기심의 그림자는 아닐까 싶어

요즘 생각이 많다.

 

그 존재의 우주와 내 우주가 불가피하게 맞물리고 있다.

한쪽으로 흡수될 수도, 둘 다 영영 사라질 수도 있지만

그저 흘러가게 두고 싶다.

 


니체와 슈티르너의 입장은 차이가 많지만 이 지점에서는 상당히 비슷하다.

니체 역시 사랑과 이타주의를 나약함과 자기부정으로 여긴다.

니체는 사랑의 욕망이란 갖고 싶은 것을 쟁취할 능력이 없어서

'사랑'으로 얻으려 하는 노예근성의 전형이라 본다.

그러기에 이타주의와 인간애는 퇴화 현상이다.

 

니체가 생각하는 건강하고 훌륭한 귀족주의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자기 이익을 위해 희생시킨다는 특징이 있다.

사회는 한 명의 엘리트를 더 높은 의무자로

더 높은 존재로 성장시킬 수 있는 토대이자 뼈대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인간 경멸과 이기주의는 니체의 저서 곳곳에서 발견된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이 맞는 걸까? 

'나와 반대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더 끌린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니체가 말하는 사랑이 이런 것일까.

우리가 처음 보는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던가

나와 반대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내가 원초적으로 그것을 갖지 못하기에 '사랑'을 수단으로 얻으려 하는 것일까.

 

니체의 귀족주의는 현재 한국 사회를 시사하는 듯하다.

대한민국의 상위 10퍼센트가 하위 90퍼센트를 끌고 간다는 말이 있다.

사람 한 명 한 명을 존중하며 모두가 잔잔하게 행복한 사회보다는

'사회'는 국가가 성장할 수 있도록 냉철한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이다.


현대의 인간 유형은 두 가지 의미에서 이기적이었다.

남에게 관심이 적었고, 자기 이득을 채우려 안달복달했다.

하지만 이런 이기심의 주인공이 정말로 지성과 감성의 가능성을

모조리 갖춘 개체로서의 개인일까?

 

알고 보면 '그'는 그가 맡은 사회경제적 역할의 장식물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중요할 때도 있겠지만 결국 경제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하나의 톱니바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사회에서 요구하는, 혹은 사회에서 요구한다고 착각되는 모습을

우리 개인에게 투영하려 했는지 의문이다.

경제적 여유를 빨리 가져서 결혼을 하고

집을 사고 안정적 직장을 찾는, 그런 것들.

 

그 이데올로기에 맞춰 살아가려다 보니

본인도 모르게 이기심을 품었던 것은 아닐까.

넓게 보면 경제를 움직이는 하나의 톱니바퀴라 할지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하나의 소중한 인생이기에

그 괴리감에 이기심을 멀리 할 수도, 가까이할 수도 없는 걸까.


4. "창의적인 삶 "

우리가 특정한 사람을 본다고 믿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우선 부수적인 것만 본다. 그의 피부색, 옷 입는 방식, 사회적 지위,

교육, 다정한지 여부, 자신에게 도움이 될지 여부만 본다.

 

그 이상은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우리 모두에겐 보편적 공포가 있다.

상대에게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갈까 봐,

표면을 뚫고 그의 핵심으로 밀고 들어갈까 봐 겁낸다.

 

차라리 덜 보고 말지 더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와 함께하는 순간의 계획에 꼭 필요한 이상은 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겉핥기 식 만남은 타인에게 무관심한 우리의 내면 상태와 일치한다.

 

우리는 대상을 볼 때 '눈'으로 보고 '뇌'에서 연산을 거쳐 본다고 믿는다.

겉으로 드러나는 부수적인 것들만 보인다.

 

누군가 나에 대해 집요하게 궁금해하면 본능적인 거부감이 든다.

'말로만 듣던 도를 아십니까 인가? ' ' 몰래카메라 하는 건가? '

 

각자 본인의 삶을 이뤄나가기 바쁜 현대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의 겉핥기 식 만남이 발생하는 것 같다.

타인 무관심. 자기애의 정반대라고 부를 수 있을까?

 

본인 내면만 가꾸고 사랑하다 보니

나 이외의 것들과의 자연스러운 거리감이랄까.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고 사랑하려 하면

자연스럽게 내 주변에도 나에게 관심을 보인다.

내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으려고 애쓰는 행위보다

내가 진심으로 내 주변을 대했을 때 더 효과적인 것 같다.


한 사람을 그의 온전한 현실에서 바라보는 경험은

때로 갑작스럽게 느껴져 깜짝 놀랄 수도 있다.

벌써 100번이나 본 사람을 100번째 만남에서 갑자기 온전히 바라볼 수 있고,

이전에는 한 번도 그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는 기분이 들 수 있다.

 

그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와 과거의 이미지가 너무도 달라

그의 얼굴, 동작, 눈동자, 목소리가 더 강렬하고 구체적인 새로운 현실성을 획득한다.

 

그렇게 우리는 보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를 배울 수 있다.

 

만남의 횟수에 상관없이 특정 사람을 만났을 때 ' 이 사람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부정적, 긍정적인 모습 들을 새로 마주했을 때의 경험이다.

내가 알던, 혹은 내가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그 모습들을 와장창 깨버리는

왠지 모를 통쾌함, 흥미로움,  나는 내 지인조차 잘 모른다는 신비함이 느껴진다.

 

보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

보이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연스레 생기는 가치와 편견들이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일까.

 

내 생각조차 나의 생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자아,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자기 행동의 진짜 주인으로 경험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독창성이다. 내가 말하는 독창성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기원을 두는 경험이다.

 

나도 언제부턴가 이런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내 모든 생각과 행동에 나의 이유가 존재했고, 열정을 두었다.

그러다 보니 자존감이 높아지고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세상의 아름다움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내 삶의 에너지가, 내 밖으로 내 주변으로 새는 것이 아닌

내 주변으로 갔다가 다시 나에게 들어오는 느낌.


원래 평등이란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귀하며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우리 모두 동일하며, 혹은 종교적으로 풀이해서

만인은 신의 자녀이며 다른 사람을 자신의 신이 나 주인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평등이란 우리 모두가 온갖 차이를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동일한 인간 존엄성을 갖는다는 뜻이다.

우리에겐 우리의 차이를 개발할 권리가 있지만,

타인을 착취하는 데 차이를 요구하며 이용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오늘날 평등은 무리와 달라서는 안 된다는 의미의 동일이다.

차이가 평등의 원칙을 위협할 수 있다는 공포가 널리 퍼져 있다.

 

故 이건희 회장 이 강조했던 개인 차, 개성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 차이를 갖고 있다.

차이가 있다 한들 다 같은 존엄성을 갖는 것이 진정한 평등이겠다.

차이는 말 그대로 '차이' 일 뿐이지 그 수치에 비례해서 그 존재의 '가치'가 정해지면 안 된다.

 

'내가 너보다 실적이 좋으니까 너는 이 단순노동이나 도와줘' 정도의 예시가 적절하겠다.

타인을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사람은 어딜 가도 그 습관으로 무너지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특정 집단에 속해있을 때 그 집단에서 나의 위치를 확인한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을 빠르게 찾아서 그 사람보다 동등하거나 더 성장하기 위해 애쓴다.

어쩌면 나도 타인을 수단으로 사용할지도 모르겠다.

 

성실한 사람을 닮기 위해 '모토'를 정해 성장하는 건 좋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목표를 세움과 동시에 나는 사람들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셈이다.

 

내가 성장하는데 방해가 되는 사람들에겐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부, 감정 두 가지 상황 모두에서 말이다. 호의적일 이유가 없다 생각이 든다.

같이 성장하고 싶지 같이 도태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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