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도에 관하여 - 임경선 에세이

2022. 11. 15. 15:40기타/독서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분석한 책이다. 무겁고 복잡할 수 있는 주제들을 쉽고 명료하게

설명해준다. 내가 삶을 살아가면서 갖게 된 가치관,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생각들 중 말로 

설명하기 힘들어서 간지러운 부분들이 많았는데 이 책이 정말 다 긁어줘서 너무 좋았다.

 

저자는 '자발성'  '관대함'  '정직함'  '성실함'  '공정함' 5가지로 책을 나눴다.

1. '자발성'


세상에서 가장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 나다.

생각하는 것에만 너무 중점을 두다 보면 자칫 행동하지 않을,

움직이지 않을 부정적인 이유를 만드는데 생각이 더 쓰인다.

나한테는 무리니까, 난 이것밖에 못하니까, 라며

스스로에 대한 선입견을 만든다.

 

나는 '나'의 존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나를 '이렇다'라고 단정 짓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에 대해 잘 모르기에 그런 결핍을 감추고 싶어 하는 방어기제 일수도 있겠다.

나도 중, 고등학교를 다닐 때 나의 한계를 내가 정하곤 했다. 겁이 많은 아이였던 것 같다.

 

스물넷 지금도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하다 보면

현재 본인의 '지위'라도 누가 정해줘 존재하는 듯이 상황을 탓하고 부동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런 생각을 가져야만 할 수 있는 말들이 있다. 그 말들을 나에게 하는 사람들에게,

나도 그랬었다. 나는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서 고쳐나가는 중이다. 구차하게 설명하기 귀찮다.

 

나의 조언은 정말 그 사람을 위한 것인지 그저 나의 깊은 이기심이

나는 이 정도로 성장했다

은근슬쩍 드러내며 만족감을 얻기 위함일까.  요즘엔 조언을 하기 전에 이 생각이 앞선다.


자신의 수준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나한테는 이것이 최선이야,라고

현실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큰 용기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행동을 일으킨 다음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얻는 깨달음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머릿속에서 선만 긋는 것과는 다르다.

 

정확하다. 너무 정확하다 못해 그때의 내가 읽었다면 아팠을 것 같은 느낌이다.

움직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어쨌든 움직이는 게 좋더라.

 

내가 나를 아는 듯이, 나는 이게 최선이야. 이게 맞지 않을까? 이게 나랑 잘 어울리는데?

이런 생각들을 하곤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생각을 한 나 자신을 뿌듯해했다.

'나는 정말 열심히 사는구나' 착각하기 딱 좋다.

 

'열심히'라는 단어를 나는 참 좋아했다.

엄마도 어릴 적 나에게 열심히, 책임감 이 두 단어를 많이 강조하셨다.

지금까지도 너무 좋은 영향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더 깊게 들어가면, '열심히'라는 단어 자체는

굉장히 파괴적이다. 내가 열심히 했다는 근거. 보상은 어디에 있는가. 기준은? 쟤는 같은 '열심히'인데

나보다 더 높은 성과를 낸다. 그럼 나는 '열심히' 안 한 거니까 어린 나는 무너지곤 했다. 

 

열심히 하라는 말은, 그 말을 한 사람의 숨은 요구사항이 있는 것 같다. 걱정이든 질투든 뭐든.

결과가 안 좋거나, 겉으로 보기에 그 사람의 진행과정이 안 좋아 보이면 돌변하니까.


애초에 완벽한 선택, 완벽한 확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충족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정답 같은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숱하게 실패한 선택들이 공존했을 것이다. 

 

만일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어땠을까, 라며 또 하나의 인생을

자신에게 주어진 옵션이라고 착각하고 제멋대로 상상하던 나는 뭐랄까,

내가 현재 살고 있지 않은 대안의 삶에 멋대로 싸움을 붙인 후

알아서 지고 있었다.

 

요즘은 실패라는 단어가 너무 좋다. 성공, 정답, 완벽만 추구하던 내 삶이

실패를 인정하고 포용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행복해졌다. 인간은 수많은 선택지에서 고민한다.

삶의 본질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그 눈부신 선택 뒤에 어쩔 수 없는 그림자들은 존재하기 마련인데,

나는 그림자를 외면하곤 했었다. 심지어 그 선택조차 상황에 떠밀리는 듯한 선택이었다.

 

온전하지 못한 선택이 온전하고 이상적인 결과를 낳을 리 없다.

내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나아가면 그 결과가 어떠하든 그것조차 내 삶이다.

너무나 완벽한, 존재하지도 않는 이상적인 삶을 바라지 않았었나 생각해봤다.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 그 자리에서 주저앉거나 선택을 기피한다. 

실패와 친해진 뒤로는 삶에 대한 걱정이 많이 줄었다. 걱정은 주변에서 하는 거라 생각할 거다.


"어떻게 하면 소설가가 될 수 있을까요?" 이에 소설가 김영하 씨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 마세요." 

나는 김영하 작가의 저 대답이 "넌 할 수 있어" 보다 훨씬 더 상대를 배려하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그 일을 하고 싶다면 그것이 안전한지, 적성에 맞는지, 내가 생각한 대로의 꿈의 직업일지,

사전 검증이 있든 없든 어떻게든 그 일에 가까이 가려고 할 것이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나는 절대 하지 않는 고민상담을 자주 하는 듯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책임감을

중요시하게 여겼던 나는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부 내 책임이 어느 정도는 반드시 있다

의식하고 살아왔다.

 

내 주변 사람들한테 내가 어디서 들은 '남'의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힘든 일조차 얘기하지 않는다.

본인의 힘든 상황을 어느 정도 해결해줄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에게는 토로할 수 있겠다. 사람은 힘들 때

불특정 다수의 '남' 에게 의존하는가, 아니면 '본인의 기준'에 있어서 날 도와줄 수 있는 경제적. 심리적 여유를

지닌 사람에게 무언가 바라며 의존하는가.

 

혹은 본인도 모르는 이기심이 남을 신경 쓰지 않고서 그 감정을 흩뿌리는 것인가.

본인의 걱정이나 과오는 본인 몫이다. 의문이 든다면 그 감정은 허상이라 생각한다.


"제 연애는 정상인가요?"

연애에 '정상'이 어디 있으며 그런 게 있다고 한들

왜 남들이 하는 그대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남자 친구의 관계가 주변에 어떻게 보일까 가 더 신경 쓰인다면

사랑하는 상대를 깊게 바라볼 여유는 언제 생길 수 있을까?

 

여자 친구가 연애 상담을 하는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이해 안 되는 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바람직하지만, 성숙하지 못했던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연애는 둘이서 하는 건데, 둘 사이에 발생한 문제를

둘이서 해결하지 않고 남들이 자취를 남길 여지를 준다는 게 싫었다.

 

어쩌면 나는 책임감을 소중히 했지만, 너무 소중히 해서 결핍이 되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책임감이 잘못된 방향으로 뻗쳐 나가는 건가 생각도 했었지만, 나로서는 그저 싫었다.

여자 친구가 무책임해 보였다. 

 

무책임해 보이면 어떠한가. 그 모습조차 그 존재의 내면이자 겉모습인데.

나도 모르게 내 이상을 연인에게 투영하고 있었나.

나는 연인에게 최선을 다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답은 정해져 있다.


2. '관대함'

같은 연애에 항복하는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건 인생의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코 스스로를 관계에서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짜 약한 사람들은 오히려 상처받지 않으려고 앞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과거의 아팠던 경험으로 상대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거나,

철벽을 치거나 나의 문제를 상대방에게 투영하는 사람들이다.

 

연애를 하다 보면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필연적이다. 사람들은 알면서도 외면한다.

교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인을 보면 매우 치열하게 느껴진다.

한 사람이 특정 가면을 드러내면, 상대방은 상극하지 않도록 맞는 가면을 쓴다.

서로의 가면이 수시로 바뀌며 서로 '착각'속에 관계를 유지한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본인의 기준에 있어서( 상대방의 기준은 묵살한 채 ) 가면을 벗을 시기가 되면,

그 가면을 벗는 순간 관계가 흔들린다. 감정은 변했지만 우리의 D-day가 다가오는 상황은 그대로기에

이것 또한 사랑이라고 착각을 한다. 

 

사랑하면 솔직해야 하고, 포기할 줄 알아야 하고, 포기하기 힘들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본인이 연애하는데 힘들면 딱 '그만큼만' 사랑하는 사람인 것이다.

본인을 더 가꾼 후에 연인을 만나야 건강한 연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식은 부모라는 껍질을 깨고 나와야 어른이 된다. 성장은 나의 부모가 나처럼

한낱 불완전한 인간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부모와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해결하지 못할 바에는 물리적으로 벗어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도저히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며 계속 부모 이슈를 붙들고 산다면 어쩌면 내가 일부러

부모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려는 게 아닌지 냉정하게 자문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인간 생명체는 부모가 직접 양육하면 그런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모두 부모의 영향이다.

당연히 나도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글씨는 네 얼굴과 같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다' 등

보편적이라고 여겨지는 사회적 관념들을 주입당했다.

 

부모님과 다툼이 있었을 때, '부모'라는 존재가 당연했던 나는 뭐든지 부모님의 탓으로 치부했다.

속으로는 내 자존심인 걸 알고 있었다. 부모님은 절대 부당하게 혼내지는 않으셨다.

그저 내 무능함을 드러내기 싫었던, 나의 부족함이었다.


3. '정직함'

인간관계를 가급적이면 '관리'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인간관계를 제외하고는 부디 놔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다 좋아한다고 하면 당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이다.

당신은 모두를 기쁘게 할 수는 없다. " - 브라질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

 

초, 중, 고등학교는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선택이 크게 좌우하지 않으며

정해진 무리 내에서 그럭저럭 잘 맞는 친구들과 관계를 반강제적으로 맺어온 셈이다.

 

성인이 되면 자연스레 멀어진다고들 한다. 정말로 그렇다. 어쩔 때는 '나는 친구가 없는 건가?'

라는 불안감이 밀려올 때도 있었다. 제일 중요한 게 인간관계다, 결혼식 하객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등

그런 조건에 내가 충족하지 못하는 건가? 착각이 들기도 했다.

 

불안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지금은 확신한다. 멀어진 관계는 자연스레 두는 게 건강한 관계다.

붙잡는다고 붙잡히지도 않는다. 철저히 '남' 이니까. 가족이 아니고서야 목숨 걸 이유가 전혀 없다.

 

이런 발언을 주변에 하면 냉철하고 이성적이고 이기적이라 한다. 그런 사람들은

꼭 죽을 때까지, 끝까지, 마지막까지 남을 전적으로 믿기를 바란다. 나는 가면 쓰는 삶이 싫다. 믿지 않는다.

 

지나가는 관계는 지나가게 두고, 새로운 관계로 채우면 되는 게 나만의 인간관계다.

지나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새로 채워지는 것도 다 이유가 있더라. 

그 이유를 모르는 게 문제지, 사람이 몇 명 늘어나고 줄어들고 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알고 보니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람과 내가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아주 친한

사이임을 발견하고 당황하는 경우도 많다.

"너 같은 애가 왜 그런 애랑 친하게 지내지?" "너도 곧 나처럼 당할지도 몰라"

라고 타이르고 싶어 진다. 내 기분이 좋지 않아도, 그것은 그들의 관계.

우정을 빌미로 개입하거나 심적인 부담을 줄 권리는 내게 없다.

그것은 그 사람과 나의 슬픈 화학작용이었을 뿐.

 

'우정을 빌미로'라는 문구가 마음에 든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본인의 입맛에 맞춰서 상대를

고르고 편 가르기 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특히 성인보다는 중, 고등학생 때 자주 본 듯하다. 

무리에 속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모두가 yes를 외칠 때 쉽사리 no를 외치지 못하는

친구들을 많이 봤다.

 

관계에 주도권이 없는 것이다. 본인의 인간관계임에도 본인이 이끌어갈 용기조차 없다.

그저 물 흐르듯이 인간관계를 '관리'한다고 착각 하지만 본인 삶에 무관심한 나태함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싶은 관계는 과감하게 끊으면 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본인'의 관계 한정.

남의 인간관계까지 거들먹거릴 권리는 없다. 육체적 폭력만이 폭력은 아니다.


사랑이나 현실이냐, 그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개개인의 자유다.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올바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느 쪽도 '자율적으로' 선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이 남자가 괜찮냐'는 질문의 포커스는 결국 '그'가 아니라 '나'일 뿐이다.

 

'사랑파'냐 '현실파'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나쁜 것은 

내가 뭘 원하는지, 어떤 가치가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모르겠지만 사랑에 척도가 있는 듯하다. 남 눈치를 많이 보는

한국사람들의 심리인지는 모르겠다.  사랑에 빠져서 본인 인생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본래 본인의 인생에 가치가 없었던 것인지 스스로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이 내 인생의 전부인 듯 착각을 한다. 

그 사람을 만나고 내 삶의 방향이 달라졌다, 그 사람과의 삶이 내 목표다 등

본질적으로 파헤치면 스스로의 인생 방향성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람을 통해 방향을 찾았다 라는 의미로 사랑할 수 있지만, 온전하지 못한 개인이

어떻게 또 다른 개인을 사랑하는가, 사랑한들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가.

그건 개인의 삶이 존중된 사랑보다는, 한쪽으로 치우친 채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행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완벽한 사랑을 추구하는 게 아니다. 불완전한 사랑도 추구한다. 하지만 관계에서 사랑을

찾기 전에, 본인을 사랑하는가를 먼저 알고 싶다.


책은 이제 사양 산업이다. 책은 팔리지 않는다. 유명해야 팔린다.

일단 이름을 알려야 한다. 혹은, 한국에서 작가로 인정받으려면

정식으로 등단을 해야 한다. 정통 문학 작가가 아니면 진짜 작가가 아니다.

 

이런 '세상은 원래 그래' 같은 명제에 나는 어쩐지 반항하고 싶어 진다.

지금으로서는 그 반항과 저항의 방식이 기왕이면 창의적이고

지속적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건 그것대로 괜찮은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내 여자 친구는 미술을 전공했다. 나랑 가장 가까운 사람이 예체능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작가가 되고 싶어 했다.

되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걱정보다는 아니었다. 꼭 앞에 '하지만' 이 따라다녔다.

높은 학력이 요구되고, 수많은 돈을 지불하며 시간도 오래 걸린다.

유명해지지 않으면 밥 먹고 살기 힘들다.

 

미술, 음악, 문학 분야에서 '원래 그렇다' 고 통용되는 것. 결국엔 끝까지 들어보면 '돈' 이더라.

돈이 많은 작가들은, 음악가들은, 시인들은

본인의 작품을 누가 훼손해도 여유로울 수 있다 한다. 원래 돈이 많아서

여유롭게 글 쓰고, 그림 그리고, 노래했다고 한다.

 

물론 주워들은 얘기고, 내 주변에는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한 명도 없다.

그런 얘기들의 여파가 큰 꿈을 가진 젊은 사람들의 사기를 꺾게 되는 것 아닐까 싶다.

"정말 내 지인 중에 작가가 있는데, 돈이 엄청 많이 들어 진짜라니까? "

그래서 너는 그 돈을 벌고 삶을 투자할 생각은 없는 거잖아. 밖에는 답을 못해주겠다.

 

내 여자 친구도 많은 혼란을 겪은 듯했다. 하지만 삶을 대하는 방식을 조금 유연하게,

여유롭게 생각하면 '미술'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한 채 또 다른 가치를 추구하면 된다.

마음속 한편에 큰 꿈을 간직한 채, 잊어버리지 않고 언젠가 한 번 꺼내면 되는 것이다.

정말 간절하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본인이 한 걸음씩 이루고 있다.


4. '성실함' 

일을 바꾸는 것은 과거의 나를 완전히 지우는 것 같지만, 자신의 본질적 자산은

그 어디에도 가질 않고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지금 하는 일에 힘이 되어줄 수 있다.

창의성, 성실성, 신중함, 유연성 등은 일의 성격이 달라져도 일관적으로 뒷받침이 되어주고

응용되어 쓰이는 소중한 기본 자질들이다.

 

일과 자신을 분리하는 능력은 중요하다. 일을 '일' 자체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 

그 일이 요구하는 시간, 지식, 돈 등은 부수적인 것들이며 본인이 삶을 대하는 태도를 유지한 채

일과 접촉했을 때 능률이 자연스레 상승한다고 확신한다.

 

본인이 이런저런 일을 한다고 끈기 없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다. 혹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아무렴 어떠한가.

 

최선을 다해 살다 보니 이것도 저것도 욕심이 생기며 열정이 넘치고 자연스레 성실해지는 것이다.

내 인생의 최우선 순위는 '후회 없는 삶'이다. 일이든 공부든 돈의 소비든 인간관계든

'내가 내 삶에 후회가 없는 것' 만큼 값진 게 있을까? 후회 없는 선택을 하다 보면 일이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쌀가게에서 건설업으로,  건설업에서 과감하게 자동차산업으로 뛰어든 故 정주영 회장님처럼 말이다.


어떤 일을 어디서 하더라도 일의 본질은 같다. 최선을 다해야 하고, 사람들과

조율할 줄 알아야 하고, 규칙을 따라야 하며 스스로를 통제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조직 생활도 나의 지울 수 없는 과거이자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곳임을 인정한다.

 

변화 이전의 모습이 '악'이고 변화 이후의 모습이 반드시 '선'은 아니다.

 

경험을 소중히 하라는 말 같다. 사람들은 '선'을 바라지만 그 속엔 반드시 '악'도 존재한다. 내가 '선'을 택해

남이 자연스레 '악'을 택한다면 나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상황 탓을 많이 했었던 어렸을 적 나는 '경험'에 무지했다. 성공 ( 특히나 남들의 시선에서 )만이 유일한

경험이라고 추구했던 나는 나의 모든 자잘한 경험들이 쓸모없다고 생각했다.'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들어도 와닿지 않았다. 비로소 성인이 되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사람이 많이 모인 퇴근시간 버스 정류장에서, 남들을 툭툭 치고 밀고 다니는 사람들, 식당에서

주문할 때 반말하고 투덜대며 우월감을 느끼려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화가 많이 났었다.이제는

화를 내기보단,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내가 배울 부분에만 집중한다.

그런 사람들을 대하며 웃어넘기는 사람, 혹은 같이 화를 내는 사람 등 여러 가지 상황이

나를 매 순간 성장시킨다. '선' '악'을 불문하고 모든 경험은 나의 자산이다.

 

경험을 소중히, 현재 매 순간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뒤로는 자연스레 능률이 올라갔다.

내가 상사 앞에서 쓴소리를 듣는 그 순간조차 배울 점은 반드시 존재한다.


나는 20대 때 35살 이후의 인생을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35살까지 일하고

그다음엔 '그 후에도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인 줄로만 알았다. 웬걸, 그 후에도

길고 긴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우리가 변해간다 해도 결코

변하지 않을 일에 대한 좋은 태도들을 내 안에 차곡차곡 쌓아나가고 싶다.

 

'변화'라는 개념은 전혀 새롭거나 화려한 것이 아니다.

'변화'는 '변하지 않는 것'에서 온다.

 

'변하지 않는 것'에서 오는 '변화'. 이런 역설과 불완전함이 나는 좋다.

변하지 않는 것에서 온다는 게 뭘까. 변하지 않고 살다 보면 자연스레 갈망하며 변하는 것일까,

혹은 꾸준히 성장하며 살다가 주변을 돌아봤을 때 달라진 내 모습, 환경들을 보며

'변했구나' 할 수 있는 것일까.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일에 대한 좋은 태도들을 유지한 채

새로운 상황을 마주하면 잔잔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습관적으로 집단에 흡수되어 상대편을 거부하고 미워하는 것에만 익숙해지면, 

'No'의 타당성과 내용보다 누가 더 격하게 No 를 외치냐에만 집중하게 된다.

'No'를 표명한 것 자체에 이미 배불리 만족이 되다 보니

뭐가 'Yes' 인지도 정확히 밝히고 인정해야 하는데 아무도 그에 대한 말은 하지 않는다.

 

서로를 이해해서 접점을 찾으려고 다가가는 것조차도 '타협'이라며 지탄을 받는다.

대체 타협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비겁함과 기회주의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었을까.

 

카테고리인 '성실함' 과는 거리가 멀지만 내용이 좋아서 기록한다. 

정말 맞는 말이다. 시대를 관통하는 명언이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지는 않지만,

모든 집단이 이러하지는 않지만 내 주변에서 가끔 보인다. 

 

인간의 본질적 본능인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것일까.

집단의 양면성이 드러나는 문구다.


5. '공정함'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자는 말은 정말로 최선을 다했는데도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잠시 나를 다독이는 용도로 쓴다면 모를까, 언제부턴가 이 말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이용되는 것 같다.

'이게 나야, 어쩔래?'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 이렇게 말하며 현실을 외면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아름답지만 이대로의 내가 좋다고 하면서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일 생각은 없다.

 

있는 그대로의 나, 라고 하는 것은 실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나'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본인의 약점이 드러나는 걸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나 또한 그랬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남이 나의 부족함을 거론할 때면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로 할 말 없게 만들기 일쑤였다.

 

맞는 말이다. 정말 우연의 일치로 난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순간이 싫어서 회피할 뿐, 방어기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순간을 모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속으로는 찝찝한 기분을 모른 체하기 힘들 것이다.


왜 그렇게 계속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했던 걸까? 곰곰 생각해보니

나는 자존감 부족을, 나의 불안정한 자아를, 타인과의 관계 즉 인정 욕구로 채우려고 했다.

그러려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단 1명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하회탈을 쓰더라도

'좋은 사람'이 되면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착각해서

스스로에 대해 안심하게 되지만 실상은 진심으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오래 버텨낼 수가 없다.

 

그 어느 때라도 인간관계가 기쁘기 위한 기본은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의 내 모습을 내가 좋아하는가'이며

연기는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다.

 

내가 가끔 여자 친구에게 하는 말이 있다. '가짜 모습'. 여자 친구는 받아들일 때도 있고, 외면할 때도 있다.

인간관계에 끌려다니면 힘든 점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유지가 되는 와중에도, 언제 끊어질까 두려울 뿐이다.

물론 내 여자 친구는 건강한 생각을 지녀서 인간관계에 무작정 끌려다니지는 않는다.

가끔 솔직하지 못하게 행동하는 모습이 신경 쓰여서 '너 그거 가짜 모습이잖아' 하곤 했다.

 

그건 언제까지나 내가 관찰한 그녀의 행동을 '내 경험'으로 판단한 결과이기에

정답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말에 흔들리는 그녀의 생각이 하회탈의 반증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의 내 모습을 내가 좋아하는가'. 즉 그 사람과 함께할 때 내가 온전한가 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관계에 너무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에게는 그냥 싫은 사람이 있는가? 그냥 왠지 싫은 사람.

미묘하게 거슬리기 시작하고 괜히 그 사람 생각만 하면 마음이 전전긍긍.

그리고 그 사람을 미워하는 나 자신에게 더 화가 난다. 뭘까, 이런 마음.

 

내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는 상대보다 '나'에 대한 일말의 진실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니 초점을 상대에게 두기보다 자신의 마음에 먼저 두어야 할 것이다.

 

타인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쉽다. 나 자신을 정직하게 보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내가 어느 순간 타인에 대한 비난으로 열을 올린다면 나는 그것을

내 안의 공허함이나 불안함에 시선을 돌리라는 자가 신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살다 보면 나와 반대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혹은 '저 사람이 싫다'라는 감정만 남기도 한다.

나를 예로 들자면, 대학교 교수님 중 한 분을 싫어한다. 수업 40분 전에 지방 출장을 가셔서 결강을 하시거나,

수업 내용도 본인의 분야와 거리가 조금 있다 싶으면 책을 줄줄 읽거나 정말 수업을 안 하신다.

 

물론 학교의 본질은 돈을 소비하며 지식을 얻는 공간이지만, 매 순간마다 내가 알아서 공부해야 하지만,

'학생'과 '교수'가 만나 지식을 나누는 공간에서 수업에 관심이 없는 교수에게 나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나는 모든 분야의 교수님들을 존중한다. 그들은 각자의 분야에 몰입하여 '박사'의 타이틀을 거머쥐었으며

새로운 분야를 접해도 금방 적응하며 연구하며 사회에 이바지하는 그들이 존경스럽다. 

 

하지만 그 교수님 수업은 너무 싫어서 출석만 하고 딴짓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한다. 그 순간조차도 성장하며

배우긴 하지만 문득 교수님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지 않다.

 

이러한 '원초적인 미움'을 외면하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어느 순간 상황 탓만 하고 있는 나를 깨달았다.

수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금 딴짓하듯이 듣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보지 않기 위해 수업을 안 들으면 되는 것이다.

수업은 듣고 싶은데, 그 사람 때문에 시간이 아까우면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다른 데에 집중하면 되는 것이었다.

 

더 수준 높은 수업을 듣고 싶은 욕구, 성장하려는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시간에 대한 불만, 

노력을 하지 않고 상황에 초점을 두는 나의 이기심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 혼자서는 풀어헤칠 수 없었던 의문점들을 해소시켜준 책이었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해주는 책은 언제 읽어도 매력적이다. 

故 정주영 회장 자서전 이후 처음으로 '평생 간직해야겠다' 싶은 책이다.

 

기록한 이외에도 매력적인 문구가 많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읽어볼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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