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2

2023. 1. 4. 15:55기타/독서

5. "죽음에 대한 태도"

개인은 착각에 빠져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 믿지 않고,

따라서 행동으로 죽음의 위험을 막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는 동안 인간은 죽음을 생각하긴 하지만

죽음을 실질적 가능성으로 경험할 수 없다.

 

우리는 죽음을 은폐하고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우리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시신을 예쁘게 단장한다. 장례식은 전문가인 장례지도사의 손에 넘어가고,

슬픔의 감정은 되도록 참아야 하는 사회적 사건이 된다.

 

내가 보기엔 이와 같은 죽음의 부인은 우리 문화 전체를 관통하는 자세와 깊은 관련이 있다.

다름 아닌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다.

르네상스 이후 자연은 우리에게 지배의 대상이었다.

인간은 자연을 완전히 정복하고, 인간이 결정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며,

신처럼 전지전능해진데 매우 큰 자부심을 느낀다.

 

죽음이 기술의 한계를 보여주기에, 이 참기 힘든 사실을 그냥

부정해버림으로써 처리하려 노력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인간은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본 적 있다.

맞는 말이다. 인간의 수명은 정해져 있으며 불멸이란 허상이다.

 

끝까지 오래 살고싶은 감정이야말로 자연을 거스르려는 매우 비합리적인 성향이다.

일찍 죽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자세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나 또한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해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 누가 죽음을 경험해 볼 수 있나.

 

자연에서 발생한 생명체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현상을,

그 자연의 종속인 인간이 거스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자연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삶 또한 자연 그 자체이며

환경적인 모든 것들 또한 그렇다.

정복감은 먹이사슬 최고 포식자의 어쩔 수 없는 본능적 착각인 셈이다.

우리 모두 잠깐 자연을 빌려 삶을 누리며 지나가는 존재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기 삶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삶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이 모순적으로 들리는 것은 모두가 삶에 너무나 집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 문화에서 대부분은 아니라 해도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가벼운 만성 우울증에 시달리며

사는 게 그다지 즐겁지 않다 느낄 것이라 확신한다.

 

너무나 살고 싶은 것과 죽음이 끔찍하게 두려운 것은 다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감정

다시 말해 기쁨도 의미도 없는 삶을 살았다는 감정과 함께 자라난다.

 

진정으로 사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존재와 내면 활동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문화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가진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나는 내가 가진 것'이라는 모토를 지향한다.

그들의 자기는 가진 것의 총합이며 가장 값비싼 소유물은 자신의 자아, 자기 자신이다.

 

그들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아니라

가장 값진 것, 즉 자기 자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다.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인 나는, 저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

나는 해당되지 않지만 내 주변에는 습관적으로 남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몇 있다.

 

본인과 남을 비교하는 건 정말 너무 부정적인 에너지다.

하루의 끝에 본인을 돌아보고 어제의 나와 비교하는 건 좋다.

하지만 남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500가 치의 결과를 이뤄내도

단숨에 501의 결과를 이뤄낸 남과 비교를 하고

또다시 600을 이뤄도 600.5를 이뤄낸 남과 비교를 할 게 뻔하다.

 

물론 남과 비교를 해서 본인의 부족함을 깨닫고 성장하는 발판으로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수동적'인 결심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적은 항상 가까이에 있다.

어제의 나를 이기지 못하면 그 어떤 좋은 상황이 뒷받침해주어도 타인 '한 명'  이길 수 없다.

경쟁 사회에서 몇 천, 몇 만 명을 돌파하고 싶다면 방법은 정해져 있다.


6. "무력감에 대하여"

인간에게 봉사하고 행복을 선사하기로 정해져

인간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세계가 되고,

인간은 그 세계에 비굴하고 무기력하게 복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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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후대의 역사가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보다

이 상황을 더 이상하다고 여기며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요즘 시대에 잘 들어맞는 말이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서 좋은 점들이 많지만

반대로 안 좋은 점들도 꽤 많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어린 나이에 개인 PC, 개인 스마트폰을 지니며

혼자만의 시간 및 공간에 익숙해지면서

사회성도 결여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어느 날 전 세계의 스마트폰이 

한 순간에 사라진다면 우리 인간은 많은 불편함을 느낄 것 같다.

 

무력감의 대상은 매우 다양하다. 첫 번째 대상은 인간이다.

자신은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확신이 존재한다.

다른 사람을 통제할 수도, 자신이 바라는 일을 그들이 하게끔 만들 수도 없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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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바로 그런 이유로 자주 이상할정도로 공격적인 말을 내뱉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이 그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에 완전히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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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은 누군가 자신을 사랑하거나 좋아하도록 만들기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다.

남들과 잘 어울리려는 노력도, 타인의 사랑과 호감을 얻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적극적으로 해보려는 노력도 전혀 하지 않는다.

 

나와 닮았다. 예전의 나는 '인생은 흐르듯이' 라는 뉘앙스의 생각을 자주했다.

내가 인생을 바꿀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그런 생각을 하면 공격적인 말을 할 때가 있는건가??

 

친구들에게 가끔 너무 솔직하거나, 공격적으로 말할 때가 있었다.

친한 친구가 내 말에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 친구에게 절대 그러지 않고있고

내 인생 전반적으로 그런 생각을 고쳐나가고 있다.

 

남들에게 딱히 큰 관심이 없고 만나게 되는 사람만 만나던 나에게

많은 생각이 들게 해주는 부분이다.

 

무력감은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아니, 어쩌면

개인에게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무력감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그중 한 가지가 내면에서 일어나는 충동과 불안에 대처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이런 사람에겐 충동과 불안을 통제하려는 노력이라도 해볼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아예 없다.

 

그의 모토는 이렇다. '나는 원래 그래. 절대 바꿀 수 없어.'

자신을 바꾸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일은 없는 것 같다.

혹은 자신을 바꿀 각오가 되었다며 자랑을 늘어놓을 수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그 때문에 더 끈질기게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확신에 집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습관이 생각을 만들고, 그 생각대로 행동하는게 사람이라고 들은 적 있다.

'나는 원래 그래' 라는 문장이 '나'를 정말 그런 사람으로 이끈다고 믿는다.

 

20살 때 그런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했을 때 내가 쟤보다 머리가 좋은데

나는 고등학교 때 너무 노는걸 좋아해서 대학교를 원하는곳에 못갔네.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원래 그래' 와 비슷한 부류의 생각들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과 마음이 뿌리깊게 내려앉으면,

다른 상황에서도 부정적인 마음들이 불쑥 튀어나온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안좋은 생각이 반복되곤 했었다.

특히나 20살에 심했던 것 같다.

'성인'이 되었으니 떳떳하게 살고는 싶은데

내적으로는 그게 안되니 더 불안하고 스트레스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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